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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in the sky

인요한, 국민의 힘 혁신 위원장에 관하여

by alanpark 2023.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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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요한 교수가 국민의 힘 혁신위원장이 되었다.

 

지지하는 정당을 떠나서 인용한이라는 좋은 컨텐츠를 가진 분이 국민의 힘 혁신위원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앞으로의 국민의 힘 행보에 살짜 궁금증을 자아내긴 한다.

정치에 관하여 무관심인 사람이 사회적 평판이 좋은 사람을 선임하여

국민의 힘 행보에 관심을 준다는 것만으로 선택 자체는 좋은 것이라 생각한다. 당을 떠나서.

 

인요한이라는 사람은 현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가정의학교실 교수 /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이다.

즉 의사다.

 

1959년 12월 8일 (63세)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 예수병원에 태어난 인요한은

대한민국과 미국 복수국적의 소유자다.

 

인요한의 진외증조부 유진 벨은 스코틀랜드계 미국인이며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

1895년 4월 8일 한국에 파송되어 광주·목포 지역에서 활동하며 학교와 병원을 설립한다.

 

그의 딸 샬롯 벨은 인요한의 친할아버지 윌리엄 린튼과 결혼한다. 윌리엄 린튼은 미국 앨라배마주에서 태어났으며,

22세 때 한국에 와서 48년간 전주와 군산 일대에서 선교와 교육, 의료봉사를 해왔다.

 

백범 김구 선생의 주치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고 3.1 운동 당시에는 기미독립선언서 작성 참여와 운동의 지원, 해외에 홍보를 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이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은 적 있는데, 그 공로가 인정되어 2010년에 3.1 운동 91주년 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국가보훈처 보도자료. 첨부파일에서 건국훈장 애족장 28명 중 '윌리엄 린튼 W.A.Linton (3.1운동)' 확인 가능

 

그의 아버지 휴 린튼은 윌리엄 린튼의 3남이다. 할아버지의 선교활동 영향으로 전라북도 군산에서 출생하였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태평양 전역에서 포로로 잡힌 한국인 노무자들을 돌보기도 했다. 이후 신학대학을 다니던 중 한국전쟁 소식을 듣고 해군장교로 복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였다. 이후 자신의 아버지인 윌리엄 린튼의 한국 선교활동을 이어받았다. 어머니 로이스 린튼은 미국 플로리다 출생의 미국인이며 신학대를 졸업하고 결혼을 통하여 남편을 따라 한국으로 이주했고 현재도 한국에 거주 중이다.

 

둘째형 스티브 린튼은 북한 어린이에게 의약품을 보내는 유진 벨 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80회 이상 방북했으며 김일성과도 두 차례 만났다.

 

4대째인 인요한 자신은 2012년에 한국사회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특별귀화를 통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인요한의 형 스티브 린튼(인세반), 5대째인 조카 데이비드 조나단 린튼(인대위), 조카 레이첼 조이 린튼도 독립유공자의 자손에게 부여하는 대한민국 국적을 수여받고 복수국적을 허용받았다. 기사에 인요한의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의 독립운동 기여 공로가 소개되어 있다. 뉴스영상

 

연세대 의과대학 동창 인연으로 만난 치과의사 출신의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였다. 자녀로는 1남 2녀를 두고 있다.

 

2021년 4월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인요한의 조카 데이비드 조나단 린튼(한국명 인대위)이 출연했다. 직업은 변호사로 인요한의 첫째 형(데이비드 역크 린튼)의 아들이다.

 

2023년 10월 23일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이 되었다. 총선 출마자나 윤석열 정부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로 하마평에 올랐던 인물이였으나 혁신위원장이 된건 예상 밖이라는 의견이 많다.

 

'내 고향은 전라도'라는 책을 쓴 만큼 전라도에 관한 애정이 깊은 인물이다. 그 중에서도 순천시에 대한 애정이 큰 편인데, 본적으로 치면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전주시이지만 어렸을 때 성장한 전라남도 순천시를 자신의 고향이자 뿌리로 삼고 있는 듯하다. 방송에 출연하면 "나는 전라도 촌놈 인요한", "순천이 우주의 중심입니다" 등의 애향심을 많이 보이고 있다. 그래서 2016년 6월 16일에는 고향 순천시의 순천만국가정원 명예 홍보대사 1호로 위촉되었다.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한국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어학당 생활을 했을 때 한국어로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매우 찐한 순천 사투리가 입에 붙어서 고생을 했다고 한다.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한 인요한의 순천 친구들이 회상하는 내용에 따르면, 의사가 되고 나서 한턱 쏘기 위해 친구들을 서울로 초대했는데 덩치 큰 외국인이 찐득한 전라도 사투리로 "아따야~ 오랜만이다잉~"하며 친구들을 반겨 이목이 집중되었다고 한 에피소드부터, 첫 월급으로 부모님 장지갑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 들어갔는데 친구들 앞에서 대뜸 "깎아주쇼!" 하는 패기를 보여줬다고 한다. 의사가 되고 나서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고향 말보다는 표준어를 쓰는게 어떻겠냐는 조언을 받아들여 공식석상에서는 되도록 표준어 억양을 구사하려고 하지만 편하게 말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고향말과 고향의 억양이 튀어나온다. 요즘에는 예능 프로에도 많이 나오는데, 예능에서는 아예 100% 고향 말투로 달려버린다(...). 이 문단만 보면 그냥 상경한 전라도 사람 A라고밖에 생각이 안 든다

 

TV는 사랑을 싣고와 집사부일체 인요한 편에서 본인이 밝히기로 어렸을 때는 거의 본명처럼 불린 별칭이 인쨘이였다고 한다. 심지어 학교 상장에도 당시 인쨘이 라고 적힌 것으로 인증. 영어 본명 존 린튼에서 성씨는 할아버지 대부터 린튼씨에서 린을 따와 두음법칙으로 인이라 삼았고, 존이라는 이름은 당시의 외국 발음에 찐한 순천 사투리가 합쳐져서 쨘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인씨네 쨘이 인쨘이라는 뭔가 미국 스타일이면서 찐한 시골풍 이름이였다고 한다.

 

순천에서 일반 한국 유치원과 한국 초등학교를 다녔다. 다만 당시 인요한의 형들이 한국 학교를 다녔던 바람에 영어를 잘 못하고 한국말을 더 잘했던 경험이 있는 탓에 부모님이 막내 아들 인요한만큼은 영어 교육을 잘 시켜야겠다는 중요성을 느끼셨다고 한다. 그래서 중간에 영어를 배우기 위해 한국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미국 통신제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홈스쿨링 교육을 통해 이수했다고 한다. 중학교 때부터는 형들을 따라 대전광역시 외국인학교에 진학했지만 미국적인 분위기와 문화 차이 때문에 적응을 못해서 힘들었다고 하였다.

 

인요한이 예능에 출연한 일이 없어서 그럴 뿐이지, 만약 예능에 출연했다면 '나훈아 vs 남진', '최동원 vs 선동열'처럼 경상도에는 하일, 전라도에는 인요한이라는 구도가 나올 수도 있을 법했다. 하일은 변호사니까 문과의 하일, 이과의 인요한도 있을 법 했을 듯 경상도 문과 vs 전라도 이과 실제로 두 사람은 막역한 사이로, 할리가 마약 스캔들과 희귀암 투병을 하며 마음 고생이 심할 때 인요한이 곁에서 진심으로 위로해줬다며 할리가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호남의 굴곡진 현대사와 인생을 같이 했다. 대학 재학 중 5.18 민주화운동의 소문을 듣고 광주에 몰래 들어가 당시 참혹했던 현장을 두눈으로 똑똑히 지켜봤고, 시민군의 영어 통역을 맡기도 했다.2006년 프레시안 기사2013년 동아일보 기사 이것이 훗날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찍혀서 데모 주동죄로 추방을 당할 뻔했다. 심지어 당시에 냉전 구도 속에서 대한민국 정치적 안정을 바라던 미 대사관 측은 전두환 군부에게 항의편지가 왔다고 하면서 '니가 폭동의 주동자야!' 라는 비하를 듣기도 했다고. 당시 외신기자의 영어 통역을 맡은 것을 두고 '당신이 한 일은 통역이 아니라 데모 주동이다. 당신의 조상들이 한국에서 좋은 일을 하여 처벌은 하지 않겠으니 대한민국을 떠나라'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때 국외추방, 폭동의 주동자로 구속, 경찰에게 감시당하는 조건으로 고향에서 근신하기의 선택지가 있었는데 당시 인요한은 고향 순천 시골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 고향에서 근신하기를 택했다. 집사부일체에서 푼 회고에 따르면 순천에 남기 위해 군사훈련까지 자처해서 받았을 정도였으니 인요한의 고향 사랑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문무대 훈련을 받고 대한육군협회에서 상을 받았는데, 돌아오는 길에 전라도를 배신한 것 같다는 느낌에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한다. 훗날 기무사(당시 보안사) 요원이 인요한을 사찰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사찰 정도가 아니라 국가의 요주의 인물로 이름이 올라있었다는 사실, 당시 정보부에서 다시는 못들어오게 일가족 모두를 추방시킬 이야기까지 들었다고.

 

미국에서 넘어온 할아버지는 3.1운동을 지원하고 해외에 알린 독립운동 기여자로, 아버지는 6.25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 유엔군 참전용사로, 손자는 5.18 민주화 운동의 진실을 알리는데 참여하며 3대가 나란히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 참여하고 기여한 역사를 가졌다